대하20:20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유관순에게 덜커덩거리는 기차소리는 ‘조선독립 조선독립’을 외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파고다 공원의 만세운동행렬에서부터 3월5일 서울역과 종로의 만세 집회 이후 일제는 전국의 학교 문을 닫았고,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던 그녀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천안의 교회에 모인 어른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내놓고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하며 만세운동을 촉구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어른들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향인 용두리의 매봉교회는 전 교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거사일은 아우내 장터의 장이 서는 음력 3월1일 (양력 4월1일)..

그녀는 면내 어른들과 교회, 학교를 찾아 다니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설득했고 밤이면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날 장터는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장터 한가운데의 쌀섬 위에 올라갔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돼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렸습니다.

일본 헌병들이 달려왔지만 만세 행렬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헌병들은 마구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3,000여명.. 49명이 죽었고 부상을 입은 사람은 부지기수였습니다.

꽃다운 청춘을 제물로 바친 순교자요 순국 열사 유관순…

그녀는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으로 불탔던 신앙의 딸이었고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으로 불탔던 애국의 딸이었습니다.

유관순은 한경직 목사님이 태어나신 해인 1902년 천안군 병천 마을(아우네 마을)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숙부가 매봉교회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기독교 집안이었고, 아버지는 늘 자녀들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해 민족의 일꾼이 돼야 한다’며 기도했습니다.

유관순은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잠들었을 때 기도실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신앙이 독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가난한 친구에게 자기가 먹을 점심을 주고 자기는 점심을 먹지 않고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매사에 적극적이며 친구들과 좋은 교우관계를 가졌고 봉사정신이 강했습니다.

14세가 되던 해 서울의 이화학당 3학년에 편입해 가면서 유관순의 신앙과 민족애는 더욱 뜨거워졌고 이화학당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에게
‘조선의 막달라 마리아’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으로 유관순은 체포됐습니다. 재판정에서 검사가 “조센진 너 까짓게 무슨 독립이냐”라고 비아냥거리자 유관순은 검사의 어깨를 쳤고 이로 인해 함께 재판 받던 사람 중 가장 무거운 7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유관순이 마지막으로 수감된 곳은 서대문 형무소였습니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때마다 매를 맞았지만 굽히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독립선언서를 온몸으로 실천한 것입니다.

당시 감옥에는 최씨라는 한국인 간수가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같은 동족으로 일제를 위해 일하는 그를 증오했지만 유관순은 오히려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최씨는 그녀의 기도에 감동해 하루는 유관순을 따라 같이 만세를 부르다가 혹독한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20분 유관순은 고문과 영양실조로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녀의 나이 19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나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가녀리고 어린 소녀가 이런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온 몸이 찢기고 더럽혀져 그 시신마저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버려 졌습니다.

죄명은 오직 하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것..

그녀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일제가 이곳을 군용지로 개발하면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고, 유관순이 다니던 충남 천안
용두리의 매봉교회는 만세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불태워졌으나 해방 뒤 재건, ‘유관순 기념 교회’로 지정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을 386세대라고 합니다. 3.1절을 모르고, 8.15 광복절을 모르고, 6.25 사변을 모르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또한 요즘 애국애족, 나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 구태의연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은 그냥 휴일이 아니며 우리 나라의 보호 아래서 살수 있는 오늘이 그저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21:3~4]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모세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고, 사도 바울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지사들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겪었던 때마다 한 손에는 성경을 쥐고, 또 다른 한 손에는 태극기를 붙잡고 이 나라를 이끌고 한민족을 지켰습니다.

고당 조만식, 우남 이승만, 월남 이상재, 남강 이승훈, 도산 안창호 등 여러 민족의 선각자들, 민족의 사표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9세기 말 개화의 과정과 일제 치하에서 독립하는 과정 중에 성경이 한글로 번역이 됨으로써 교회는 한글 깨우치기 교실을 운영하여 문맹퇴치 사업과 한글 대중화에 기여하였습니다.

찬송가는 교회에서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찬송가의 곡조에 나라 사랑과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가사를 붙인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기독교 정신으로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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